J.
악몽을 꿨다. 형은 날 더러 도경수를 놓아주라고 했다. 죽은 형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보고싶어할 땐 매정하게도 나와주지 않은 사람이, 꼭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만 나에게 나타난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도경수를 놓아주라고 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릴 적부터 날 옥죄던 악몽은 더 이상 내 기분을 나쁘게 할 순 없다.
익숙해져있기 때문. 그렇지만, 그 악몽에 도경수가 들어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불안하다.
며칠 전, 도경수는 변백현과 헤어졌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것이었는데, 그렇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도경수에게 다가가는게 예전 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예전엔 도경수가 남의 것이어서 다가가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두렵다. 도경수에게 다가가는 것이. 혹여나, 욕심이 생길까봐서.
一.
[ 나 떠나. 내일. ]
[ 미국으로 갈거야. ]
[ 미안했다. 잘 있어라.]
내가 지독히도 오랜 시간 아프고 시달렸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어이없게 허무한 끝이었다.
변백현과의 끝. 그리고 물리적인 끝. 변백현은 그렇게 내게 문자 세통을 달랑 남기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모르겠다, 나도. 그 아이가 정말 원해서 간 건지. 아님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게 싫었던 건지.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한다.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끝이 난 것 같아 입안이 썼다. 글쎄, 이건 미련이라고 볼 수도 없겠지. 그냥, 이건 그냥 답답함 인거다.
지나가버린 내 시간들에 대한 답답함, 그 시간에 대한 생각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어린날의 사랑이라 치부하기에 난 꽤나 진지했고,
진심이었으니까. 좋은 감정들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에 대한 소중함 또한.
˝ 업무 시간에 딴 생각 좀 하지 마시죠. ˝
웃으며 내 볼을 툭 건드는건, 보나마나 김종인이다. 많이 아팠던 시간들에게선 조금 벗어나, 어느덧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는 달라진게 없다. 어쩌면, 내게 보이는 것만 달라진게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변백현에 목을 메고 있을 땐 느끼지 못한 것들이, 그를 놓아주고 나서부터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전엔 그저 줏대없는 팀장, 들이대는 팀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종인이, 어느 순간부터 가면을 쓴 사람으로 느껴진다.
웃고 있어도 진심이 아닌 표정, 말투, 그리고 어딘가 상처받은 눈을 가끔 내비치는 그 모습이.
그냥 김종인의 눈빛이 변백현을 짝사랑하던 그 때의 날 무척이나 많이 닮았다고 가끔씩 생각했었다.
나는 그냥 그 눈빛이 싫었을 뿐이다. 내가 더 비참해지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이젠 그 눈빛이 싫지 않았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분명 이 사람도 상처는 많은 사람이구나. 내가 그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음 좋겠다. 그저 이런 생각만 들 뿐.
누구보다 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이를 흉내내는 어른같은 사람. 딱, 그런 사람. 나보다 훨씬 생각이 많고, 배려도 깊으며, 진심으로 말할 줄 알지만.
늘 광대역할을 도맡아 하며 실없이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 같았다. 백현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자주 보이던 종인의 모습이 그랬다.
이렇게 여유가 생기니 다른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지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진작 이럴 걸 그랬나봐. 나는 어디에 얽매여 살았던 걸까.
˝ 딴 생각 안했는데요. ˝
˝ 그럼 내 생각했구나? ˝
˝ 무, 무슨 소리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
˝ 듣긴 누가 들어요. 도경수씨 혼자 야.근.하는 시간에. ˝
˝ … 근데 팀장님은 왜 퇴근 안하세요? ˝
내 질문에 김종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본인의 책상에 걸터앉는다. 아, 저렇게 걸터앉으면 또 청소 나 시킬거면서.
김종인은 꼭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청소부 아주머니들을 뒤로하고, 본인의 책상을 나더러 닦으라고 시키는 것.
일개 말단 직원인 나는 예, 하며 군소리 없이 닦긴 하지만, 곧 김종인의 의도를 깨닫고 귀를 붉히며 내 자리로 돌아온게 한 두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컴퓨터 옆에 놓인 작은 액자에 담긴 내 증명 사진 이라던가, 컴퓨터 마우스 키패드 밑에 놓인 ㅡ언제 훔쳤는지 모를ㅡ 내 고등학교 시절 스티커 사진이라던가.
혹시, 소매치기 전과라도 있으세요? 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던 내 질문에 꺽꺽대며 웃던 김종인까지 생각난다.
아, 또 예전 생각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김종인이랑 쌓은 추억이 많다고 자꾸 멍을 때리는건지.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헛웃음이 난다. 으으, 소름돋아. 어쩐지 닭살이 돋는다.
˝ 혼자 혀도 차고 웃기도 하고 북치고 장구치고~. ˝
˝ 왜 자꾸 보는데요. ˝
˝ 빨리 일 다 끝내요. 갈 곳 있으니까. ˝
시계를 흘끗 보니 어느덧 밤 11시다. 미친거 아닐까? 밤 11시에 갈 곳이 어딨다고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야근을 저렇게 혼자 무식하게 기다리겠다는건지.
하지만 김종인의 무대뽀식 일 진행에는 이미 지쳐있었기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엑셀을 이렇게 메일 보내고 서류만 서명 받으면….
二.
˝ 뭐야? 여기 어디에요?!!!!!!! ˝
˝ 바다. ˝
˝ 바아다?!!!!!!!!! ˝
드디어 미친걸까. 김종인은 드디어 미친게 분명하다.
업무를 오전 1시 쯤 마치고, 김종인의 차에 탄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론 아무런 기억이 없다. 아마도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듯 하다.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아직도 차 안.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그리고 옆을 보니 김종인. 밖을 보니.
˝ 아니 웬 바다에요?!!!!!!!! 말이나 하던가!!!!!!! ˝
˝ 말 하면 안 올거잖아요. ˝
어쩐지 시무룩해보이는 표정을 짓는 김종인에 괜스레 찔려서 입맛을 다셨다. 쩝. 마음 약해지게 꼭 저런 소리만 골라서 한다니까.
아무런 소리 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날 보곤 환하게 한번 웃더니 버릇처럼 또 내 볼을 툭, 하고 친다.
˝ 내리자. ˝
어느 순간부터인지 또 말을 놓기 시작한 김종인. 그렇지만 예전처럼 짜증은 안 난다. 그냥 가까워진 느낌인 것 같고… 뭐, 썩 나쁘진 않네.
三.
파도 소리가 귀를 찢을 듯 하다. 아무도 없는 바다는 차갑고 추웠다.
오랜만의 휴가 아닌 휴가로, 나름의 여유를 만끽하겠답시고 맨발로 걷기도 했다. 걷고, 또 걷고.
애초에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나고, 해까지 뜰 지경이다.
툭, 툭.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옷도, 발도, 손도, 마음도 모래 투성이.
옆에서 조용히 따라 걸어오던 김종인도 발걸음을 멈추곤 멍하니 날 바라본다. 나보다 더 피곤할텐데, 문득 앞서는 걱정에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털썩, 주저 앉으니 요란한 소리가 난다. 바닷가, 대체 얼마만이지?
처음 눈을 떴을땐 '바다' 라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지만, 아니, 지금도 어이가 없지만. 왠지 아무생각 없이 거닐다 보니 조금 이해를 할 것 같기도 했다.
정리가 필요한 우리에겐 어쩌면, 이런 공간보다 더 좋은 공간은 없을 테니. 변백현도 없고, 내 짝사랑도 없는, 바다만 있는 공간에. 탁 트인 공간에.
˝ 회사를 때려치고, 확 죽어버리려고 그랬었어. ˝
몇 시간 만에 입을 열고 하는 첫 마디 치곤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고.
김종인의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늘 변백현과 제 사이에서 낑겨 답답해하긴 했어도,
표현한 적은 없었던 사람이니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 우리 형이 죽었거든. ˝
왜 이런 얘기를 할 때 웃고 그러나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울컥, 한다. 나는 왜 이사람에게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걸까.
이게 언제부터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지만, 자꾸만 이 사람에게서 내 모습이. 자꾸만.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힘들 땐 울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속앓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근데 그때 네가 존나 예쁜 얼굴을 하고 딱. 나타난거야. ˝
˝ ... ˝
˝ 난 씨발, 그게 드라마에서 있는 일 인줄만 알았지. ˝
˝ ... ˝
˝ 너 내 드라마야, 병신아. 존나 못생기고 덩치도 작은 여자주인공. ˝
˝ 뭐야, 덩치 얘긴 왜 꺼내요. 그게 무슨 상관. ˝
˝ 말이 그렇다고요. 내 마음을 네가 알긴 할까. ˝
알 것 같기도 해. 라는 말이 목구멍 까지 넘어왔지만 애써 삼켰다. 왠지 말 하면, 안 될거 같고, 아닌 것 같고, 미안하고, 어이 없을 거 같고...
으으, 왠지 모르게 몸을 감싸는 추위에 부르르 떨어버리고.
˝ 너는 변백현이 왜 좋았냐. ˝
변백현이 왜 좋았더라.
˝ 그냥, 백현이는… 백현이는. ˝
˝ 어, 변백현은. ˝
˝ 모르겠다. 원래 좋아하면 이유도 모른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 ˝
˝ 지금은 어떻고? ˝
˝ 어떻고 말고가 어딨어. 그냥, 가버린 친구지 뭐. ˝
˝ 그 이상은. ˝
˝ 전혀. ˝
˝ 정말? ˝
˝ 너 어릴 때, 백화점이나 슈퍼에서 뭐 갖고싶었던 거 없었어? ˝
˝ 어, 없었어. ˝
아, 맞다. 얘 우리 회사 아들이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너무나도 당당하게 없었다고 말 하는 종인을 보며, 한번 또 웃음이 나왔다.
˝ 난 많았거든. 우리집은 너희 집 만큼 잘 사는 집도 아니고, 아빠가 사장도 아니고, 난 평범하게 자랐으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도 다 한번 쯤 있었을걸. ˝
˝ ...그렇냐? ˝
˝ 그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갖고싶어. 내 용돈을 다 털어서라도, 3년어치 용돈을 털어서라도. 그게 건담이었나. 그랬는데. ˝
˝ 그게 뭐냐. 건포도? ˝
˝ 아, 좀 조용히 하고 들어봐. 근데, 우리 엄마 아빠는 꼭 안된다고 했다? 넌 이미 집에 많잖아, 주변을 좀 둘러보고 놀 것도 많은데 왜 또 새로운 걸 사려고 하니. ˝
˝ ... ˝
˝ 난 엄마 아빠가 이해가 안 갔어. 새로운게 아니라, 내 앞에 건담은 지금 제일 멋있는 건담이거든. 근데, 그걸로 속상하고 울기도 하고 커보니까 알겠더라고. ˝
˝ ... ˝
˝ 난, 건담이 정말 필요한게 아니었어. 그냥, 그냥 붙잡고 있고 싶었을 뿐이야. 왜냐하면, 건담이 눈에 띈 이상 주변의 모든 것들은 시시해져 버렸으니까. ˝
˝ 허. ˝
˝ 백현이는 건담이야. 내 고집의 상징이고, 오기였어. 백현이가 내 왕자가 아니라, 건담 장난감이었다는 걸 알아버린 것도 오래됐어. 그냥, ˝
˝ ...하. ˝
˝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백현이도 아팠고, 나도 더 아팠고, 그리고. ˝
˝ 그리고? ˝
손을 꿈틀 대다가 김종인의 고개를 들어 김종인을 눈을 본다. 김종인은, 꼭 내가 말 할때 내 눈을 바라봐준다.
변백현이 해주지 않은 것들, 나를 웃게 해주는 것들, 내 사소함도 지켜봐 줬던 것들, 그리고 날 좋아해준 시간들.
˝ 너도 아프게 했어, 미안해. ˝
˝ ...씨발. ˝
˝ 백현이는 건담이었고… 너는 내 태권브이 로봇이야. ˝
˝ 뭔 개소리야 그건 또. ˝
˝ 나는 맨날 신형건담에 눈이 팔려서 갖고싶다고 졸랐었지, 태권브이 로봇은 안중에도 없었거든? 근데, 태권브이 로봇만 고장도 안 나고, 건전지도 오래 가고,
또… 어, 여튼. 엄마 아빠가 건담을 안 사주면 난 늘 울면서 태권브이랑만 놀았어. ˝
˝ 울면서 맨날 오는건 똑같네. ˝
부끄럽다.
˝ 뭐 하나 더 알려줄까? ˝
˝ 뭔데. ˝
˝ 나 아직도 태권브이 로봇 머리맡에 두고 잔다. ˝
중요한 건 모르고 산다. 어리석은 나같은 놈이라곤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나는, 특히나 더 그랬다.
내 곁엔 3살 때부터 함께 해온 할머니가 사주셨던 첫 선물인, 그러니까 정말 소중했지만 나만 몰랐던 태권브이 로봇이 있었는데.
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던 그 로봇보단 새거, 멋진, 새로운, 하지만 내가 갖지 못하는 멋진 건담 시리즈에 목을 매곤 했었다.
그 간단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왜 이 나이 먹어선 적용조차 하지 못했던 건지. 왜 그렇게 어리석었던 건지.
백현이는 나의 건담. 갖지 못했던, 하지만 갖고 싶었던. 오기로 부모님께 울고불고 떼를 쓰며 매달렸지만, 내 것이 되지 못했던.
김종인은 나의 태권브이. 그러니까, 건담을 갖지 못하고 돌아온 날이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버튼을 누르고 괴롭혀 애써 웃게 해줬던.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참, 온 나라를 다 가진듯한 감격스런 표정의 김종인이 있다.
괜스레 부끄러워, 손바닥에 모래를 얹어보니 우수수. 우수수, 우수수. 자꾸만 떨어지고.
잇따라 오는 정적이 더는 못 봐줄 것 같아 고개를 들고 무릎을 접어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내 손목을 채오는건.
˝ 도사원, 아니 도경수. 야. ˝
˝ 어? ˝
˝ 씨발, 나 키스해도 되냐. ˝
아니, 뭘. 뭐라고?
손을 뒤로 짚어버리자, 모래는 미친듯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쭈욱 미끄러진다. 이미 이성이란걸 잃어버린 듯 한 표정의 김종인은 말 그대로 내게
'돌진' 해온다. '돌진' 그래, 이 표현이 아니라면 '습격'. 그 쯤 되겠지.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대로 된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다. 일방적인, 혹은 감정없는 키스라면 몰라도.
뜨거운 김종인의 입술, 그리고 내 치열을 훑는 혀. 이런 감정적인 키스는, 그러니까, 내 온 몸으로 와닿는 이 뜨거운 김종인의 감정을, 누군가의 애정을
입으로 받아 내 본적이 없어서 그저 목석처럼 가만히 있게만 된다. 어쩐일인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고개를 살짝 돌린 김종인은, 열심히 내 혀를 두드리고, 휘감고, 애태운다. 눈을 슬쩍 떠보고 본 김종인의 얼굴은, 잘생겼네. 잘 생겼다.
눈을 감고 김종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 뒷목으로 향하던 손이 문득 멈추고, 움찔 한 혀와 입이 느껴지고.
피식, 웃으며 좀 더 적극적인 모션을 취해보이자 김종인 역시 혀를 가르며 나를 또다시 애태운다.
어쩌면, 이젠 네 마음을 더 받아들일 때 일지도 모른다.
내 상처를 보듬어준 네게 감사함을 표할 그 시간.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너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로 말이야.
四.
오랜만에 편안하게 잤다. 비록, 방이 없어 한 침대에서 김종인과 비좁게 잤을 지언정. 눈을 붙이고 영혼을 수면에 팔아 넘기기 직전까지도
신혼부부니 어쩌니 능글대는 김종인의 말을 잔뜩 듣다 잤을 지언정. 그러니까, 내 말은 마음이 편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김종인의 말들에 웃는다. 날 웃기려고, 내가 웃게하려고 하는 말 들임을 알지만,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니라 그냥 내가 웃고 싶어서.
변백현에 질질 끌려 눈이 퉁퉁 부었던 그 날에도, 나는 샤워하며 살풋 살풋 웃었던 것 같다. 자양강장제 같은 새끼.
날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분명 그것이 아님과 차이가 크다. 그게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분명한 점은 김종인 같은 관찰자가 있다는 것은
100명의 스토커를 가진 것 보다 더욱 더 시선을 느끼겠지. 김종인은, 명백하게 티를 내며 내게 다가왔으니까.
˝…형. ˝
˝ ... ˝
옆 자리에서 뒤척이던 김종인이 식은땀을 흘리는가 싶더니, 형. 이라는 이름을 내뱉는다.
아까 새벽에, 그러니까 그, 그. 그. 키스, 그래, 키스 직전 내게 어렴풋이 했던 말. 형이 죽었다고.
너의 상처는, 나는 외면을 한 것일까, 아님 정말 몰랐던 것일까.
너는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기에, 나같은 상처는 없었을 거라고 당연시 했던게 분명하다.
그런 너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줬다는게 또 한번 각인되어 깊숙하게 마음이 아파온다.
언제쯤 나는 네가 그랬던 것 처럼 너의 상처를 완연하게 덮어줄 수 있을까.
˝ 변하지마, ˝
˝ ...어? ˝
˝ 변하지마, 도경수…. ˝
잠꼬대라기엔 너무나도 크고 선명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땀을 닦아주려던 손길을 멈추고.
왈칵, 뜨거운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뭐가 대체 그렇게 무서운거니. 나와 한 침대에 자면서도, 나의 부재를 걱정하는 네 목소리는.
너는 어쩌면 나보다 더 아팠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몰랐던 것일 뿐. 내가 모른척 했을 뿐.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네가 날 괜찮게 했듯이. 네가 네 순정으로 날 감동 시켰듯이.
그냥, 너는 괜찮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五.
[나 간다.]
[ 도경수 잘 부탁할게.]
[ 미안했어.]
마지막까지 뭐가 그렇게 미안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본인도 잘 알텐데.
짐을 싸고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문득 잊고있었던 휴대폰이 생각나 켜보니, 백현의 문자가 선명히 와있고.
그 사람은 도경수에게도 연락 했을까? 했겠지. 그러니까, 새벽의 바닷가에서 처럼 마지막이라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도경수의 태권 브이랬나. 사실, 조금 감동했다. 낡아빠진 태권브이면 어때. 결국 지금 남아있다는게 그거 뿐이라는데.
폼생폼사, 부유함이 곧 지식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일지라도, 도경수에게 있어서 간지 나는 건담보단 태권브이가 나았다.
재촉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재촉하지 않았다.
늘 아파하는 도경수를 보는 내 마음이 더 아팠지만, 재촉하지 않았기에 도경수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완벽하진 않다. 세상엔 늘 완벽한 것이 없으니. 나는 여전히 형의 악몽에 시달리고, 도경수의 부재를 예측하고 불안해하며,
누구보다 어린애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 가자. ˝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는 날 일깨우는 목소리는, 도경수.
˝ 준비 다 했어? ˝
˝ 어. ˝
˝ 야. ˝
˝ 뭐. ˝
˝ 손 잡아도 되냐. ˝
˝ 아, 뭐 그런걸 하나하나 다 물어, 진짜. ˝
그래서 지금 연애를 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대답 못 한다.
도경수가 그러면 그런거고, 아니면 아닌거고.
도경수가 내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 내비쳤다고 해서 나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여전히 도경수를 짝사랑 한다. 그것이 혹시 쌍방향이 된다고 한대도, 도경수는 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니 짝사랑일게 분명하다.
이런 짝사랑이라면, 백날 천날해도 상관 없겠다는 철 없는 생각.
˝ 재촉하지 않을게. ˝
˝ 뭐래, 소름돋게. 지금 감성 터지는 새벽 아니잖아요. ˝
˝ 그냥, 씨발. 내 진심. ˝
˝ ...어, 고맙네. ˝
˝ 재촉하지 않을테니까, 씨발. 준비되면 말이나 해 달라고. ˝
˝ 씨발 없인 말 못해? ˝
˝ 씨발, 씨발, 씨발. 너만 보면 욕이 나와. ˝
˝ ...칭찬 맞지? ˝
˝ 어, 씨발. 넌 그냥 칭찬이지. ˝
조수석에 앉아 큰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그 도경수가.
오늘따라, 아니 언젠 안 그랬냐만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건지.
˝ 와, 씨발. 도경수 볼 내꺼. ˝
˝ 입술 떼시죠. ˝
˝ 도사원 짤리고 싶나. 어디 명령질. ˝
˝ 이럴때만 도사원이래, 진짜. ˝
˝ 뽀뽀. ˝
˝ 재촉 안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 예쁘지나 말던가. ˝
으으, 소름! 하며 자신의 팔뚝을 문질러대는 도경수를 보며, 시동을 걸었다.
서울에 가면, 이 병신같은 도경수는 또 존댓말과 반말을 헷갈려 할 것이며, 나를 혼란스러워 하며 여기겠지.
한 여름밤의 바닷가 꿈이래도 좋다. 그냥, 뭔가 인정받은 느낌.
늘 확신보단 애매함이 좋았다. 나는 그랬다. 나는 후계자가 확실시 되어있는 사람이고, 부자라는 확실한 증거로 친구들을 이용해왔으니.
도경수와의 관계에선 늘 을이어도 좋고, 갑이어도 좋다. 도경수니까.
아프지 않길. 나로 인해 다치지 않길.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으니, 슬프지 않길.
그러니까, 너의 낡은 머리맡 태권 브이 로봇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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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1 15:31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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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7 17:35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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